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5차 초공작전 (문단 편집) === 마오쩌둥의 실각과 소비에트의 급진화 === >"법은 혁명에 이익이 되어야 한다. 혁명에 이익이 되기만 한다면 법률적 절차는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다. 법적 절차 때문에 혁명의 이익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 >-1934년 3월 1일, 사법인민위원 양백태. 복건사변을 진압한 장제스는 복건에서 난징으로 돌아와 국민당 제4회 사중전회에 참석하여 [[린썬]]의 국민정부 주석 연임에 참석하고 다시 초공작전에 박차를 가했다. 천청의 3로군이 여천에서 남하하기 시작했고 다른 부대들도 따르기 시작했다. 1월 27일 국민혁명군은 구가애와 새두애로 병력을 진격시켰다. 홍군 9군단과 1군단 2사단이 저항했으나 국민혁명군은 횡촌, 새두애, 구가애를 연결하는 토치카 선을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홍군은 1천명을 잃고 퇴각했다. 2월 9일에는 장제스가 난창행영으로 복귀하여 다시 초공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장제스는 [[행정원장]] [[왕징웨이]]에게 천청을 북로군 전선 총사령관에, 복건을 토벌한 2로군 총사령관 장정문을 동로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초공전을 실시할 것을 타전했다. 루이진의 중앙 소비에트는 1월 15일 공산당 6기 오중전회를, 22일에 제2차 전국 소비에트 대표대회를 개최했다. 임조함이 경제보고를 하던 중 [[마오쩌둥]]이 돌연히 '긴급보고'를 제출하여 국민혁명군이 이미 복건사변을 평정하고 복건성 사현에서 명계, 청류, 천상을 공략하여 석성과 루이진을 목표로 진격 중이고 중로에서 복로군 3로군을 주력으로 한 토벌군이 여천, 광창, 영도를 노리고 있으며 영풍에서 사계를 거쳐 흥국으로 또 토벌군이 진군하고 있다고 알렸다. 복건사변의 실패와 정부군의 토벌 재개를 알게 된 693명의 대표와 83명의 후보대표들을 경악을 금치 못했고 대회는 일정이 단축되어 2월 1일 폐막했다. 이 회의에서 소련 유학파이자 상하이 임시당중앙을 이끌었던 보구(박고=진방헌)는 마오쩌둥이 토지개혁에서 우익 기회주의자로써 부농노선의 과오를 저질렀고 그가 지금껏 거둔 군사적 성과도 오로지 퇴각과 도망만 반복한 삼국지적 전술에 불과했다고 마구 비난했다. 이는 도시를 점령하여 소비에트 지구를 확장하는 노선을 신봉하던 소련 유학파의 특성+과거 유격전으로 명망을 얻은 마오쩌둥에 대한 견제가 혼합된 결과였다. 당중앙은 제3차 초공작전이 만주사변이 발생한 덕에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긴 했으나 수도 루이진의 목전까지 국민혁명군이 접근했던 것에 주목하면서 마오쩌둥의 유격전 전술의 오류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판은 4차 초공작전에서 더욱 거세졌고 당중앙이 루이진으로 이동한 이후에 폭발했던 것이다. 또한 마오쩌둥이 홍군의 지휘계통에서 제외된 이후의 4차 초공작전에서 홍군이 승리함에 따라 당중앙의 자신감은 더욱 높아졌다. 마오쩌둥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으로 재선임되었으나 대회가 끝나자마자 인민위원회 주석에서는 쫓겨났고[* 인민위원회=소비에트공화국이라는 의미였으니 이는 마오쩌둥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국가주석 자리에서 밀려났음을 의미한다.] 그 뒷자리는 뤄푸(낙보=장문천)가 차지했다. 이는 소련에 대한 통보 없이 현지에서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크게 낙심했다. 마오쩌둥은 칭병하여 업무에서 손을 뗐다. 권력을 차지한 소련 유학파는 코민테른이 파견한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는데 오토 브라운이 추구한 전술은 '단촉돌격'이라고 하여 지지점과 보루를 구축하여 비행기와 대포의 공격을 막은 다음에 정부군이 토치카에서 나와 출격하길 기다렸다가 습격하고 야음, 안개, 우천, 산림을 이용하여 백병전을 강요한다는 전략이었다. 이 전략을 바탕으로 홍군은 '한 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다!'는 슬로건 아래 반격에 나섰으나 대실패로 끝났다. > "제2군단만 폭격으로 4700명을 잃었다. 이미 보루 내 병사는 고정목표가 되었다. 병사가 3, 4명 부상을 입어도 사관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보루를 지켰다. 장교가 최후의 생존자가 되어 싸운 곳도 적지 않다. 사관이 전원 전사하여 일반병이 보루의 지휘를 맡는 경우도 비일비재였다. >---- >-린뱌오 2월 24일 [[탕언보]]가 지휘하는 10종대 4사단이 복건성의 사현을 함락시키고 홍군 4백명을 사살했다. 이어 장락, 태령, 명계를 잇달아 탈환하고 3월 말에 북로 3로군과 덕승관에서 합류함으로써 복건성의 홍군을 모두 격퇴했다. 4월 9일 천청은 광창 공략에 나섰다. 계속되는 패전과 강압적인 공출 때문에 동요한 주민들이 자유와 토지를 위해 정권을 사수하자는 선전에도 듣지 않고 소비에트를 이탈하고 홍군 내부에서도 탈영병이 속출하자 당중앙은 사실상 법치주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이를 반혁명주의자들의 변명거리로 간주하여 통치수단을 적색테러로 전환하였다. 신임 인민위원회 주석 뤄푸는 1934년 5월 22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적색테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전구에서 직접적이고 가장 신속하게 모든 종류의 반혁명 활동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호신과 모든 지주, 부농, 상인, 자본가, 상점주인, 혹은 부랑자 가운데 반혁명 활동을 수행하는 이는 모두 즉각적으로 체포되지 않으면 안된다. 공모자가 있는지 밝혀내기 위하여 철저한 조사를 필요로 하는 중요인물에 대해서는 예외이지만,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세심한 심문은 불필요하며 호송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현장에서 총살형에 처해야 한다. 특히 그들 중에서 반혁명분자라는 혐의가 있는 자들은 지체없이 체포해야 한다. 사태가 심각한 경우에는 현장에서 사살하고 경미한 경우에는 후방으로 호송하여 금고에 처한다. 노동자, 농민, 빈민 가운데 반혁명활동에 참가한 배경을 갖고 있는 자들은 그들이 지도자인 경우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총살형에 처한다. 그들이 추종자이거나 미심쩍인 사람인 경우에는 후방으로 호송하여 처벌하거나 조사한다." 이에 호응하여 강서 소비에트 전역에서 사람을 마구 죽이고 고문하는 일이 속출하였고 적색테러를 호소하던 뤄푸조차도 <마구 체포하거나 살해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비판했으며 6월 24일에는 사법기관을 무력화하고 학살에 나서는 극좌분자들을 비판했으나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어 뤄푸에 표현에 따르면 '더 많은 사람을 죽이면 죽일수록 좋다'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